단국대 정책과학연구소장 정박 김성윤
남극대륙의 황제 팽귄은 무리지어 있지 않으면 추위로 얼어 죽고 만다. 수천마리의 수컷 팽귄은 매서운 추위를 함께 극복하기 위하여 몸을 움츠리고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번갈아가며 무리 바깥쪽에 서며 안쪽으로 교대한 팽귄은 잠을 자도록 한다. 그런 방법으로 오랜 시간 스스로를 추위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고를 보면서 우리사회는 팽귄같은 이타주의가 없는 걸까! 아니면 팽귄 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걸까란 고뇌 속에 많은 국민들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평귄과 다른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어느 중학교 400m 릴레이 육상 팀에 “모두”, “누군가”, “아무나”, 그리고 “아무도”라는 네 선수가 팀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전국육상 경기대회 출전이란 절대 절면의 과제가 생겨서 이 네 사람이 회의와 토론을 거쳐 무엇인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두가 그 일을 합심하여 하기로 쉽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모두 는 누군가가 틀림없이 그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은 아무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누군가가 엄청 화를 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모두가 자기의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두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하겠거니 생각하였다. 더구나 아무도, 모두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결국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누군가를 원망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맡은바 소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알았으면 그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다. 위 예문에서 보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나 선택을 회피 하면 결국 그 피해는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피해를 줄이면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내가 하겠다는 능동적인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아가 무엇이든지 상대를 도와주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바탕으로 기꺼이 하겠다는 헌신적인 자세, 잘못된 것을 즉시 고치겠다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마치 팽귄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살아가듯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제 부턴가 내 탓이 아니오, 내 탓이 아니오만 외치고 있다. 문제의 해결보다는 문제의 지적과 책임전가에 더 매달려 있다. 그 때문에 팽귄 같은 이타적인 정신이 실종된 것은 아닌지란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세월호 침몰이후 연이어 서울지하철 추돌 사고 그리고 고양 종합터미널 지하1층 화재사고가 줄을 잇고 있다. 그때 마다 부각되고 있는 것이 사고 주위에 있는 사람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즉시 하지 않아 더 큰 화를 키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업사회와 지식정보화 사회과정을 거쳐 창조사회로 급속하게 진행해오고 있다. 이제 낡은 산업사회의 타성을 버리지 않으면 창의력이 핵심이 되는 창조사회의 내일을 기대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향후 우리나라의 사회적 변화는 즐겁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참된 것을 중심으로 한 낙미애진(樂美愛眞)의 사회로 급변할 것이라 한다. 즉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있는 사회, 인간미와 진실함이 넘치는 사회가 도래 할 것이다. 그런 사회로의 이행은 국민들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인정하며 스스로 소임을 다 해야 한다. 남의 탓만 하거나 제 할 일은 하지 않고 자기권리만 주장한다면 그런 나라의 미래는 참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역지사지 사고 속에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며 행동하는 국민이 많은 나라가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얻게 된 분명한 사실은 타성을 버리지 않으면 내일을 기대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단국대 정책과학연구소장 정박 김성윤
남극대륙의 황제 팽귄은 무리지어 있지 않으면 추위로 얼어 죽고 만다. 수천마리의 수컷 팽귄은 매서운 추위를 함께 극복하기 위하여 몸을 움츠리고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번갈아가며 무리 바깥쪽에 서며 안쪽으로 교대한 팽귄은 잠을 자도록 한다. 그런 방법으로 오랜 시간 스스로를 추위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고를 보면서 우리사회는 팽귄같은 이타주의가 없는 걸까! 아니면 팽귄 같은 방법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걸까란 고뇌 속에 많은 국민들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평귄과 다른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어느 중학교 400m 릴레이 육상 팀에 “모두”, “누군가”, “아무나”, 그리고 “아무도”라는 네 선수가 팀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전국육상 경기대회 출전이란 절대 절면의 과제가 생겨서 이 네 사람이 회의와 토론을 거쳐 무엇인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두가 그 일을 합심하여 하기로 쉽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모두 는 누군가가 틀림없이 그 일을 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은 아무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누군가가 엄청 화를 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모두가 자기의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두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하겠거니 생각하였다. 더구나 아무도, 모두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결국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누군가를 원망 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맡은바 소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며 알았으면 그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다. 위 예문에서 보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나 선택을 회피 하면 결국 그 피해는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피해를 줄이면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내가 하겠다는 능동적인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아가 무엇이든지 상대를 도와주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바탕으로 기꺼이 하겠다는 헌신적인 자세, 잘못된 것을 즉시 고치겠다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마치 팽귄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살아가듯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제 부턴가 내 탓이 아니오, 내 탓이 아니오만 외치고 있다. 문제의 해결보다는 문제의 지적과 책임전가에 더 매달려 있다. 그 때문에 팽귄 같은 이타적인 정신이 실종된 것은 아닌지란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세월호 침몰이후 연이어 서울지하철 추돌 사고 그리고 고양 종합터미널 지하1층 화재사고가 줄을 잇고 있다. 그때 마다 부각되고 있는 것이 사고 주위에 있는 사람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즉시 하지 않아 더 큰 화를 키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업사회와 지식정보화 사회과정을 거쳐 창조사회로 급속하게 진행해오고 있다. 이제 낡은 산업사회의 타성을 버리지 않으면 창의력이 핵심이 되는 창조사회의 내일을 기대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향후 우리나라의 사회적 변화는 즐겁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참된 것을 중심으로 한 낙미애진(樂美愛眞)의 사회로 급변할 것이라 한다. 즉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있는 사회, 인간미와 진실함이 넘치는 사회가 도래 할 것이다. 그런 사회로의 이행은 국민들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인정하며 스스로 소임을 다 해야 한다. 남의 탓만 하거나 제 할 일은 하지 않고 자기권리만 주장한다면 그런 나라의 미래는 참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역지사지 사고 속에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며 행동하는 국민이 많은 나라가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얻게 된 분명한 사실은 타성을 버리지 않으면 내일을 기대 할 수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