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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호메르스의 대서사시:오디세이 연재]“과수원의 나무들이 증명한 마지막 재회…아버지가 알아본 아들 (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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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혼자들의 영혼은 저승으로 향하고, 오디세우스는 늙은 아버지 라에르테스를 찾아간다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아내 페넬로페와 재회했다.

움직일 수 없는 올리브나무 침대의 비밀이 두 사람이 부부임을 증명했고,

20년 동안 쌓였던 의심과 슬픔은 서로의 품 안에서 눈물로 녹아내렸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다.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시골 농장에서 늙어 간 아버지 라에르테스였다.

그보다 먼저 이야기는 죽은 구혼자들의 영혼이 향한 어두운 저승으로 옮겨 간다.

궁전에서 쓰러진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곳에서 아가멤논은 페넬로페의 지혜와 변함없는 마음을 듣고,

그녀의 이름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노래 속에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오디세우스는 아버지를 찾아 과수원으로 향한다.

아내에게는 침대가 두 사람의 사랑을 증명했다면, 아버지에게는 오래전 아들에게 한

그루씩 선물했던 나무들이 부자 사이의 기억을 증명한다.

하지만 기쁨의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죽은 구혼자들의 가족들이 무기를 들고 복수하러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르메스가 이끄는 구혼자들의 영혼

오디세우스의 궁전에는 죽은 구혼자들의 시신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이미 육신을 떠나 어두운 저승으로 향하고 있었다.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가 황금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그 지팡이는 사람의 눈에 잠을 내리기도 하고, 잠든 이를 다시 깨우기도 하는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헤르메스가 지팡이를 움직이자 구혼자들의 영혼이 그를 따라 나섰다.

그들은 어두운 동굴 깊숙한 곳에서 놀라 날아오르는 박쥐 떼처럼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서로 가까이 모인 채 떨면서 헤르메스의 뒤를 따랐다.

영혼들은 거센 물살이 흐르는 오케아노스강과 세상의 끝을 지나갔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을 통과하고, 꿈이 드나드는 문과 흰 바위 곁을 지났다.

마침내 그들은 저승의 들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트로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웅의 영혼이 머물고 있었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안틸로코스와 큰 아이아스가 함께 있었고,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도 트로이에서 함께 싸웠던 전사들의 영혼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몰려온 수많은 젊은 영혼을 바라보았다.

모두 귀족의 자제처럼 보였지만, 어느 누구도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가멤논은 그들 가운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알았던 암피메돈의 영혼을 발견했다.

암피메돈은 이타케 출신으로, 예전에 아가멤논이 오디세우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를 환대한 사람이었다.

아가멤논이 물었다.

“암피메돈이여,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많은 젊은이가 한꺼번에 저승으로 내려왔는가?

너희는 나이도 비슷하고 모두 이름난 집안의 자제들처럼 보이는구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한 것이냐?

아니면 적의 도시를 공격하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냐?”

암피메돈의 영혼이 대답했다.

“아가멤논 왕이시여, 우리는 바다에서도 전쟁터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디세우스의 궁전에서 그가 쏜 화살과 창에 쓰러졌습니다.”

 

저승에서 밝혀진 구혼자들의 마지막 날

암피메돈은 자신들이 어떻게 오디세우스의 집을 차지하고 살았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떠난 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결혼을 요구하며 날마다 궁전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페넬로페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을 남편으로 선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궁전에서 완전히 쫓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시아버지 라에르테스가 죽을 때 입힐 수의를 다 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낮에는 커다란 베틀 앞에 앉아 천을 짰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횃불을 밝히고 낮에 짠 부분을 다시 풀었습니다.

우리는 그 계략을 알지 못한 채 3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한 하녀가 비밀을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페넬로페가 밤마다 천을 푸는 모습을 직접 보고 더는 미룰 수 없게 했습니다.”

암피메돈은 이어서 오디세우스가 거지 모습으로 궁전에 들어온 일과

페넬로페가 활쏘기 시합을 열었던 일도 설명했다.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의 활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 활에 시위를 걸고, 줄지어 세운 열두 개의 도끼 구멍 사이로 화살을 통과시키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구도 활에 시위조차 걸지 못했습니다.

그때 궁전에 들어와 있던 늙은 거지가 활을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조롱하고 막으려 했지만, 텔레마코스가 활을 건네도록 허락했습니다.

거지는 너무나 쉽게 활에 시위를 걸었습니다. 그

리고 화살을 열두 도끼의 구멍 사이로 정확히 통과시켰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두 번째 화살을 들어 안티노오스를 쓰러뜨린 뒤에야 끔찍한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거지가 바로 오디세우스였습니다.”

암피메돈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문은 모두 잠겨 있었고 무기는 치워져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 곁에는 텔레마코스와 충직한 두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이 그들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도망칠 수도, 맞서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쓰러졌습니다.

우리의 시신은 아직도 오디세우스의 궁전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가족들은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가멤논이 페넬로페를 찬양하다

암피메돈의 이야기를 들은 아가멤논은 깊은 탄식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떠올렸다.

아가멤논이 트로이에서 돌아왔을 때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척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남편을 죽일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아가멤논은 자신의 궁전 안에서 아내와 그 정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아내는 달랐다.

20년 동안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었지만 집을 지켰다.

수많은 구혼자의 압박 속에서도 지혜를 잃지 않았고,

마침내 돌아온 남편을 알아보았다.

아가멤논이 말했다.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로구나.

그대는 얼마나 훌륭하고 지혜로운 아내를 맞이했는가.

이카리오스의 딸 페넬로페는 젊은 시절 결혼한 남편을 끝까지 기억하고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신들은 페넬로페의 지혜와 변함없는 사랑을 아름다운 노래로 만들어

인간 세상에 오래도록 전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먼 훗날에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저승에 있는 아가멤논에게 페넬로페의 이야기는 더욱 아프고도 빛나는 것이었다.

한 아내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은 그는, 다른 아내의 충실함과 지혜 덕분에

고향과 가정을 되찾은 오디세우스를 부러워했다.

페넬로페는 단순히 남편을 기다린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그의 집과 가문의 기억을 지켜 낸 사람이었다.

또한 힘없는 처지에서도 시간을 벌고 상대의 욕망을 이용하며 끝까지

자신의 선택권을 놓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은 오디세우스의 명예에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나란히 사람들의 노래 속에 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가야 할 사람

한편 이타케에는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오랜 세월 기다려 온 아내와 밤을 보냈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구혼자들의 가족이 곧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텔레마코스와 에우마이오스, 필로이티오스에게 무기를 갖추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궁전을 떠나 할아버지의 농장으로 간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혼자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가족들이 곧 움직일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도 당부했다.

“당분간 위층 방에 머물러 있으시오.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창가에 서거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마시오.”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 두 충직한 하인은 무장을 하고 궁전을 나섰다.

아테네가 짙은 안개를 내려 그들의 모습을 감추었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이타케의 길을 따라 네 사람은

라에르테스의 농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오디세우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과수원 사이를 걸으며 나무들의 이름을 배우고,

언젠가 자신에게 주어질 땅을 바라보던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였다.

오디세우스는 텔레마코스와 두 하인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먼저 집 안으로 가서 식사를 준비하시오.

나는 과수원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겠소.

아버지가 나를 보자마자 알아보실지,

아니면 오랜 세월이 흘러 알아보지 못하실지 확인하고 싶소.”

텔레마코스와 에우마이오스, 필로이티오스는 농가로 향했다.

오디세우스는 홀로 과수원 안으로 들어갔다.

 

누더기를 입고 과수원을 돌보는 늙은 왕

과수원 안은 조용했다.

돌로 쌓은 담 안에는 배나무와 사과나무,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포도나무도 긴 줄을 이루며 언덕을 따라 뻗어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아버지를 찾았다.

충직한 늙은 하인 돌리오스와 그의 아들들은 돌담을 고치기 위해 멀리 나가 있었다.

돌리오스의 아내도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과수원에는 라에르테스 혼자 남아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한 노인이 나무 주변의 흙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노인은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가시나무에 긁히지 않도록 종아리에는 누더기를 감았고,

손에는 오래된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머리에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낡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트로이 전쟁에 나가기 전 오디세우스가 기억하던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라에르테스는 한때 이타케를 다스리던 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골에서 살아가는

늙은 농부처럼 보였다.

세월과 슬픔이 그의 등을 굽게 하고 얼굴에 깊은 주름을 새겨 놓았다.

오디세우스는 나무 뒤에 서서 한동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달려가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직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가 늙고 약한 아버지가 충격을 견디지 못할까?

두렵기도 했다.

오디세우스는 낯선 여행자처럼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앞에서 꾸민 이야기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노인이시여, 이 과수원을 돌보는 솜씨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나무마다 정성껏 가꾸어져 있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 과수원을 이토록 훌륭하게 돌보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은

제대로 돌보지 않는 듯합니다.

입고 있는 옷은 낡고 몸은 몹시 야위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종처럼 보이지 않는데,

어찌하여 이곳에서 홀로 이런 모습으로 일하고 계십니까?”

라에르테스는 낯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오디세우스가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이곳이 정말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의 나라입니까?

오래전 제 집을 찾아왔던 한 손님이 자신은 이타케 사람이며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를 정성껏 대접하고 많은 선물도 주었습니다.

그 뒤 오디세우스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궁금했습니다.

혹시 그가 이곳에 있다면 만나고 싶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들은 라에르테스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낯선 이여, 그대가 찾아온 곳은 분명 오디세우스의 고향이오.

하지만 그대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그대가 베푼 환대에 훌륭한 선물로 보답했을 것이오.

그러나 내 아들은 트로이 전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소.

어느 낯선 땅에서 짐승과 새의 먹이가 되었는지,

깊은 바다에서 물고기들에게 뜯겼는지조차 알 수 없소.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고 울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소.

아내 페넬로페도 남편의 눈을 감겨 주지 못했고,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소.”

라에르테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어디에서 왔으며 부모는 누구요?

언제 내 아들을 만났소? 그 아이는 어떤 배를 타고 있었으며 누구와 함께 있었소?”

오디세우스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꾸며 냈다.

자신은 크레타에서 온 사람이며, 오디세우스를 5년 전에 만났다고 말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신의 뜻만 따랐다면 이미 이타케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은 라에르테스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아들을 향한 그리움만 더욱 깊게 만들었다.

라에르테스는 두 손으로 검은 흙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 흙을 뿌리며 흐느껴 울었다.

한 나라의 늙은 왕도, 한때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영웅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였다.

 

더는 아버지의 눈물을 견딜 수 없었다

아버지가 머리 위에 흙을 뿌리는 모습을 본 순간 오디세우스의 가슴이 무너졌다.

그는 더 이상 시험을 계속할 수 없었다.

오디세우스는 앞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아버지, 제가 바로 그 아들입니다.

그토록 기다리시던 오디세우스가 살아 돌아왔습니다.

저는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눈물을 거두십시오.

궁전을 차지하고 있던 구혼자들은 모두 제가 벌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재산을 탕진하고 어머니에게 결혼을 강요하며

이 집안의 명예를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라에르테스는 곧바로 그 말을 믿지 못했다.

20년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오디세우스의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어떤 사람은 그가 살아 있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죽었다고 했다.

거짓 희망에 속고 난 뒤 찾아오는 절망을 라에르테스는 수도 없이 겪었다.

늙은 아버지가 말했다.

“그대가 정말 내 아들 오디세우스라면 내가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시오.”

오디세우스는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먼저 이 상처를 보십시오.

제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아우톨리코스의 집을 찾아갔을 때 멧돼지에게

물려 생긴 흉터입니다.

아버지도 제가 이 상처를 입고 돌아왔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라에르테스는 아들의 다리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더 확실한 증거를 내놓았다.

그것은 몸에 새겨진 흉터가 아니라 두 사람만이 공유한 기억이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나무들을 기억합니다”

오디세우스가 과수원의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 과수원을 걸었습니다.

저는 나무마다 이름을 물었고, 아버지는 훗날 제 것이 될 나무들을

하나씩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배나무 열세 그루를 주셨습니다.

사과나무 열 그루와 무화과나무 마흔 그루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절마다 차례로 열매를 맺는 포도밭 쉰 줄도 제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그날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길과, 아버지께서 손으로 가리켜 주셨던

나무들을 모두 기억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에르테스의 두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그 나무들의 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자신과 아들뿐이었다.

오래전 어린 오디세우스는 과수원을 돌아다니며 열매가 열린 나무를 가리켰다.

“아버지, 저 나무는 제게 주십시오.”

라에르테스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무를 한 그루씩 선물했다.

그 사소하고 따뜻한 기억이 20년의 세월을 건너 아버지와 아들을 다시 이어 주었다.

라에르테스는 정신을 잃을 듯 비틀거렸다.

오디세우스가 재빨리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라에르테스는 아들의 목을 두 팔로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오디세우스야, 정말 네가 돌아왔구나.

이제야 제우스와 신들이 정의를 돌보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구나.

하지만 구혼자들을 모두 죽였다면 그들의 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타케뿐 아니라 주변 섬의 사람들까지 복수를 위해 일어날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는 아버지의 등을 감싸며 말했다.

“그 일은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텔레마코스와 충직한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흉터와 침대와 과수원의 나무들

오디세우스의 귀환에는 여러 차례의 확인이 필요했다.

늙은 유모 에우뤼클레이아는 다리에 남은 멧돼지의 흉터로 그를 알아보았다.

아내 페넬로페는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올리브나무 침대의 비밀로 남편을 확인했다.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오래전 아들에게 선물한 과수원의 나무들로 아들을 알아보았다.

흉터는 오디세우스가 살아온 몸의 기억이었다.

침대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세운 가정의 기억이었다.

과수원의 나무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준 사랑과 삶의 기억이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진정한 정체는 이름이나 얼굴보다 오래 남은 기억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이 간직한 기억으로 오디세우스를 다시 받아들였다.

 

세 세대의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다

라에르테스는 농가로 돌아갔다.

돌리오스의 아내가 따뜻한 물로 그의 몸을 씻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 주었다.

그때 아테네가 조용히 다가와 늙은 왕의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굽었던 허리는 다시 곧게 펴졌고 야윈 몸에는 생기가 돌았다.

오랜 슬픔에 흐려졌던 눈빛도 다시 밝아졌다.

오디세우스는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아버지, 신들께서 아버지를 다시 젊고 당당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라에르테스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젊었을 때처럼 힘이 남아 있었다면 어제 너와 함께 궁전에서 싸웠을 텐데.

그렇다면 구혼자 가운데 더 많은 자가 내 창에 쓰러졌을 것이다.”

집 안에는 라에르테스와 오디세우스, 텔레마코스가 함께 앉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

오디세우스 가문의 세 세대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순간이었다.

텔레마코스는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기만 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와 나란히 싸워 집을 되찾은 청년이었다.

오디세우스도 더 이상 바다를 떠도는 이름 없는 나그네가 아니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라에르테스 역시 아들을 잃고 슬픔 속에 살아가던 노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과 손자를 바라보며 가문이 다시 이어졌음을 확인한 아버지였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말없이 앉아 있었다.

 

돌아온 주인을 알아본 돌리오스

얼마 뒤 늙은 하인 돌리오스와 그의 여섯 아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돌리오스는 아내에게서 오디세우스가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방 안에 앉아 있는 오디세우스를 직접 본 순간 그의 두 손이 떨렸다.

돌리오스는 달려가 오디세우스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주인님, 마침내 돌아오셨군요.

저희는 오랫동안 주인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신들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입니다.”

오디세우스가 말했다.

“돌리오스여, 그대가 오랜 세월 이 집안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이제 기뻐하시오.

나는 살아 돌아왔고 구혼자들을 모두 벌했소.”

돌리오스의 아들들도 차례로 오디세우스를 환영했다.

농가에는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사람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빵과 고기를 나누었다.

20년 동안 흩어져 있던 가족과 충직한 사람들이 비로소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식사를 나누는 동안 이타케의 도시에서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구혼자들의 죽음이 알려지다

아침이 되자 오디세우스의 궁전에서 일어난 일이 이타케 전역에 퍼졌다.

구혼자들의 가족들이 궁전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피로 얼룩진 방에서 아들들과 형제들의 시신을 발견하고 통곡했다.

시신은 각자의 집으로 옮겨졌고, 다른 섬에서 온 사람들의 시신은 배에 실려

고향으로 보내졌다.

슬픔은 곧 분노로 변했다.

사람들은 회의장으로 모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격렬하게 분노한 사람은 안티노오스의 아버지 에우페이테스였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람들 앞에 섰다.

“이타케 사람들이여, 오디세우스는 우리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소.

그는 트로이로 떠날 때 수많은 사람을 데리고 갔지만

단 한 사람도 살려서 귀환하지 못했소.

이제야 홀로 살아 돌아와서는 이타케의 가장 훌륭한 젊은이들을 모두 죽였소.

우리가 지금 복수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이오.

아들과 형제들을 죽인 자를 그대로 두고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겁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오.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건너 도망치기 전에 무기를 드시오.

당장 그를 추격합시다!”

에우페이테스의 말에 많은 사람이 분노하며 일어났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의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가객 페미오스와 함께 살아남은 전령 메돈이 회의장에 나타났다.

메돈은 자신이 직접 본 일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디세우스 혼자서 그 많은 구혼자를 쓰러뜨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의 곁에 서 있는 신을 보았습니다.

그 신은 멘토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불사의 존재였습니다.

구혼자들의 죽음에는 신들의 뜻이 함께했습니다.”

늙은 예언자 할리테르세스도 사람들을 말렸다.

“여러분의 아들들이 죽은 까닭은 오디세우스의 집을 침범하고

그의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차례 그들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구혼자들은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복수에 나선다면 더 큰 불행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일부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져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에우페이테스와 많은 유족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투구를 쓰고 방패와 창을 들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머물고 있는 라에르테스의 농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수원으로 다가오는 복수의 군대

라에르테스의 농장에서는 아직 식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텔레마코스는 할아버지 곁에 앉아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오랜 세월 자신을 기다린 사람들과 처음으로 평온한 식탁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농장 밖 먼 길에서 무장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복수를 외치는 구혼자들의 가족들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텔레마코스와 에우마이오스, 필로이티오스도 무기를 들었다.

돌리오스와 그의 여섯 아들도 창과 방패를 찾아 나섰다.

늙은 라에르테스 역시 갑옷을 입었다.

그는 아들과 손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아들, 이제 막 어른으로 성장한 손자,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모아 다시 창을 든 늙은 아버지.

오디세우스 가문의 세 세대가 함께 싸울 준비를 했다.

오디세우스는 긴 창을 손에 쥐고 농장 밖을 바라보았다.

20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수많은 괴물과 폭풍을 이겨 냈다.

궁전의 구혼자들을 쓰러뜨리고 아내와 아들, 아버지와도 다시 만났다.

그러나 마지막 싸움이 아직 남아 있었다.

저 멀리서 에우페이테스가 이끄는 무장한 사람들이 과수원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으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 끝없는 피의 사슬을 멈추지 않는다면,

되찾은 고향은 다시 전쟁터가 될 것이었다.

 

제24회의 핵심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가족 재회는 늙은 아버지 라에르테스와의 만남이다.

라에르테스가 아들을 알아보는 결정적인 증거는 화려한 전쟁의 기억도,

왕의 권위를 보여 주는 물건도 아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한 그루씩 선물했던 과수원의 나무들이다.

에우뤼클레이아에게는 흉터가, 페넬로페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침대가,

라에르테스에게는 과수원의 나무들이 오디세우스의 정체를 증명한다.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보게 하는 것은 겉모습이나 이름만이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함께한 기억이다.

그러나 가족의 재회만으로 고향의 평화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구혼자들은 자신들의 죄로 죽었지만, 그들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과 분노는

새로운 복수를 낳는다.

정의로운 응징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갚아야 할 피의 빚으로 보일 수 있다.

이제 《오디세이》의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복수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귀향은 적을 모두 쓰러뜨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평화를 세울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다음 25회 예고

제25회|복수를 멈춘 아테네…이타케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다

안티노오스의 아버지 에우페이테스가 이끄는 무장한 사람들이

라에르테스의 농장을 공격한다.

아테네에게 힘을 얻은 늙은 라에르테스는 마지막으로 창을 들고 아들과 손자 곁에 선다.

그러나 또 다른 살육이 시작되려는 순간,

제우스가 천둥을 울리고 아테네가 전쟁터 한가운데 내려온다.

“이타케 사람들이여, 이제 싸움을 멈추어라.”

20년 동안 이어진 전쟁과 표류, 기다림과 복수의 끝에서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평화로운 고향을 되찾는다.

  

[호메르스의 대서사시:오디세이 연재]“움직일 수 없는 침대…20년의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부부 (23회)

https://www.newsly.co.kr/4245

 

 

 
작성자 newsly 작성일 26-09-25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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