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꽃과 시가 있는 하루] 백일을 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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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들 서둘러 떠난 뒤
뜨거운 햇살만 들녘에 남으면
너는 그제야 천천히 여름의 문을 연다.
한 송이가 백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꽃이 지는 자리에서
내일의 꽃이 다시 피어
백일의 약속을 이어 간다.
먼저 핀 꽃은
떠나는 일을 슬퍼하지 않고,
뒤따라올 꽃을 위해
기꺼이 한 자리를 비워 준다.
흰 꽃은 구름처럼 맑고
분홍 꽃은 첫사랑처럼 수줍으며,
붉은 꽃은 가슴속 오래된 그리움처럼
한여름의 하늘 아래 뜨겁다.
누가 너를
목백일홍이라 불렀던가.
백일 동안 한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백 번을 져도 다시 피어나는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매끄러운 줄기에는
감출 것도 내세울 것도 없어
묵은 껍질을 벗어 버린 채
맑은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오래된 서원과 고택의 뜰에는
말없이 너를 닮고 싶었던
선비들의 곧은 마음이
붉은 꽃 그림자로 머물렀으리라.
비바람이 꽃잎을 흔들어도
너는 계절을 탓하지 않는다.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를 피워
빈 가지에 희망을 이어 붙인다.
삶도 그러하리라.
한 번의 환희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지고 다시 피는 수많은 날들이 모여
마침내 한 생애가 되는 것.
백일홍아,
백일을 피는 것은 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구나.
오늘의 내가 조금 시들더라도
내일의 내가 다시 피어나도록
가장 뜨거운 계절 한가운데서
너는 백일 동안
희망의 꽃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한여름을 백일 동안 밝히는 꽃, 배롱나무
첫 번째는 순백의 배롱나무, 두 번째는 짙은 붉은빛, 세 번째는 화사한 분홍빛 꽃입니다. 색깔은 서로 다르지만, 비단을 구겨 놓은 듯한 꽃잎과 매끈하게 벗겨지는 나무껍질에서 배롱나무 특유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납니다.
![]() ▲ 성거읍 신월 삼거리에서 ©Newsly |
배롱나무는 봄꽃들이 모두 물러난 한여름에 피기 시작해 무더위와 장맛비를 견디며 가을 문턱까지 꽃을 이어갑니다. 뜨거운 계절을 가장 화려하게 살아가는 나무입니다.
배롱나무는 어떤 나무인가요?
학명: Lagerstroemia indica L.
영문명: Crape myrtle
분류: 부처꽃과 배롱나무속의 낙엽활엽수
다른 이름: 목백일홍·백일홍나무·간지럼나무
꽃말: 부귀·떠나간 벗을 그리워함
상징적 의미: 기다림·인연·끈기·청렴
원산지: 히말라야에서 중국 남부·인도차이나에 이르는 아시아 지역
개화 시기: 대체로 7~9월
꽃빛: 흰색·연분홍색·진분홍색·붉은색·자주색
생육 환경: 햇볕이 충분하고 물 빠짐이 좋은 곳
![]() ▲ 천안시 불당동 동일 아파트 정원에서 . |
꽃말은 식물학적으로 정해진 공식 명칭이 아니어서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부귀’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으로 소개되며, 백일 가까이 꽃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기다림’과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의미도 끌어냅니다.
왜 ‘배롱나무’라고 부를까요?
배롱나무는 여름철 약 100일 동안 꽃이 이어진다고 하여 본래 ‘백일홍나무’ 또는 ‘목백일홍’이라 불렸습니다.
‘백일홍’이라는 말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에서 불리면서 ‘배기롱’, ‘배롱’으로 소리가 변해 오늘날의 배롱나무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한 송이의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지 끝에 모인 꽃봉오리들이 아래에서 위로 차례차례 피고 지기를 반복합니다. 먼저 핀 꽃이 지면 그 옆의 봉오리가 다시 열리기 때문에, 나무 전체가 백일 동안 꽃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배롱나무가 전하는 기다림은 한 꽃의 오랜 인내가 아니라, 서로 이어 피며 계절을 지켜 내는 생명의 연대입니다.
![]() ▲ 성거읍 신월 삼거리에서 . |
비단을 구겨 만든 듯한 꽃
배롱나무꽃은 여섯 장의 꽃잎을 가졌습니다. 꽃잎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구불구불하고 얇아서, 마치 고운 비단이나 한지를 살짝 구겨 놓은 듯합니다. 영어 이름 ‘Crape myrtle’의 ‘crape’도 주름진 천과 같은 꽃잎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느다란 꽃자루 끝에 달린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분홍빛 구름이나 작은 나비 떼처럼 보입니다. 꽃 중심에는 노란 수술이 모여 있어 흰색 꽃에서는 맑고 단정한 인상을, 분홍색과 붉은색 꽃에서는 화려하고 따뜻한 인상을 줍니다.
제시된 사진에도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납니다.
흰색 배롱나무: 순결하고 정갈해 한여름의 흰 구름을 닮았습니다.
진분홍 배롱나무: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강렬한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연분홍 배롱나무: 부드럽고 풍성해 여름 정원을 환하게 밝힙니다.
왜 ‘간지럼나무’라고 할까요?
배롱나무 줄기는 오래된 껍질이 얇게 벗겨지면서 속살처럼 매끄러운 표면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배롱나무를 ‘간지럼나무’라고도 부릅니다.
매끈한 줄기를 손가락으로 긁거나 문지르면 가느다란 위쪽 가지와 잎이 미세하게 흔들려, 마치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생긴 재미있는 이름입니다.
중국에서는 줄기의 매끄러운 모습 때문에 자미화(紫薇花) 또는 **파양수(怕痒树·간지럼 타는 나무)**라고도 불렀습니다.
선비의 뜰을 지킨 청렴의 나무
배롱나무는 예부터 궁궐과 사찰, 서원, 향교, 선비의 정원과 오래된 고택에 자주 심었습니다. 붉고 화려한 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해마다 묵은 껍질을 벗어 내고 속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매끈한 줄기는 꾸밈과 거짓이 없는 청렴한 선비의 마음에 비유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한자리에서 꽃을 이어가는 모습은 변하지 않는 절개와 인연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봄의 벚꽃처럼 한순간에 피었다 지지 않고, 여름 내내 새로운 꽃을 잇는 배롱나무는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움의 중심에는 견딤과 기다림이 있습니다.
꽃이 진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배롱나무꽃이 지면 둥근 열매가 맺힙니다. 처음에는 초록색이지만 가을이 깊어지면 갈색으로 익고, 여러 갈래로 벌어지며 날개 달린 씨앗을 내보냅니다.
여름의 화려한 꽃은 가을의 씨앗으로 바뀌고, 나무는 잎을 내려놓은 채 다시 다음 여름을 기다립니다. 백일의 개화가 끝난 자리에서 또 다른 백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배롱나무는 우리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기다림은 한 송이가 오래 버티는 일이 아니라, 먼저 핀 꽃이 다음 꽃에게 자리를 내어 주며 희망을 끊임없이 이어 가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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